밀라노는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2), 브레라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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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이탈리아

밀라노는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2), 브레라 미술관

여행하는 스크루바 | 2026. 3. 27.

여러분, 스크루바입니다. 어떻게 하면 브레라 미술관을 더 쉽고 재미있게 설명드릴 수 있을지 고민해봤습니다. 제 생각에 밀라노가 어떤 과정을 통해 문화적 역량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면 브레라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조금 지루할 수 있지만, 차근차근 따라와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통치와 함께 성장한 밀라노의  문화

15세기에는 스포르차 가문이 밀라노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시킵니다.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예술가가 활동하며 도시의 위상을 끌어올리죠. 하지만 16세기,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밀라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출처 : 슬로베니아 국립 미술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성 통치자이자 신성로마제국 황후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밀라노를 근대 도시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어요. 근대식 건물을 짓고 학교를 세우며 도시가 성장합니다. 18세기 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 원정으로 밀라노는 이번엔 프랑스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지만, 나폴레옹 또한 밀라노를 이탈리아 북부의 정치와 문화 중심지로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밀라노는 여러 통치자들의 개입과 정책을 거치며 그 문화적 역량을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근대 밀라노의 형성과 브레라의 전환

밀라노가 본격적으로 ‘문화 도시’로 성장한 계기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기부터입니다. 계몽군주였던 그녀는 밀라노를 근대적인 도시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교육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육성했죠. 밀라노를 대표하는 라 스칼라 극장(아래 사진)도 이 시기 마리아 테레지아의 지시로 쥬세페 피에르마리니에 의해서 재건되었습니다. 그녀의 아들 요제프 2세 황제는 이러한 정책을 더욱 구체화했고, 밀라노는 단순한 상업 도시를 넘어 지식과 예술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죠.



이 과정에서 브레라 지역도 중요한 변화를 겪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중세 수도원이 있던 이 공간을 학문과 예술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킵니다. 역시 라 스칼라 극장(위 사진)을 재건했던 쥬세페 피에르마리니 리모델링 맡게 됩니다. 1776년, 이곳에 브레라 미술 아카데미가 설립되면서 이곳은 본격적인 예술 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습니다. 즉, 브레라는 미술관이 아니라 ‘예술가를 키우는 학교’에서 출발한 공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밀라노를 점령하면서 이곳엔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각지의 예술 작품들을 수집해 많은 작품을 파리로 이동시켰는데, 동시에 일부는 밀라노에 남겨 브레라로 모이게 했어요. 브레라를 밀라노의 루브르 박물관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죠. 특히 베네치아에서 가져온 작품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 시기를 거치며 브레라는 교육 기관을 넘어 ‘작품을 보여주는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갖춰가기 시작합니다.

 

 

작품에서 전시로: 브레라 미술관의 시작

1809년 8월 15일, 나폴레옹의 생일을 기념하여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가 나폴레옹의 전신상을 제작, 전시합니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을 고대 로마의 신 마르스로 표현한 것으로, 권력을 신격화하려는 강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죠. 



이 때 브레라에 전시된 것은 완성된 청동상이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 사용된 석고 원형이었습니다. 이 전시를 위해 브레라 건물 2층에 공간이 마련되었고, 이를 일반에도 공개하면서 비로소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이라는 개념이 형성됩니다. 그것이 오늘날 브레라 미술관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석고상은 지금도 전시중이며, 조각의 비례와 형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브레라에서 만나는 예술의 순간들

 

현재 브레라는 여전히 교육과 전시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래층은 예술가를 양성하는 아카데미이자 학생들의 작업 공간입니다. 그리고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관의 전시 공간이 펼쳐집니다. 하나의 건물 안에서 ‘예술을 배우는 공간’과 ‘완성된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 이것이 바로 브레라가 특별한 이유입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죠. 이제 드디어 회화관으로 들어가 볼까요. 메인 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안토니오 카노바의 나폴레옹 석고상, <평화의 사도 마르스로서의 나폴레옹>(아래 사진)입니다. 나폴레옹을 고대 로마의 신으로 묘사한 이 작품에는 권력을 신격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나폴레옹 본인은 이 조각이 본인과 닮지도 않고 ‘나체’로 표현된 것을 못마땅해 했다는 일화입니다. 결국 완성된 청동상은 프랑스가 아닌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고, 현재 브레라에는 제작 과정에서 사용된 석고 원형만 남아 있습니다. 처음에 입구에서 본 청동상은 나폴레옹 시대 이후 새롭게 제작된 것입니다.



4번 방에 들어서니 안드레아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가 가장 눈에 띄네요. 이 작품은 극단적인 원근법, 즉 단축법으로 유명한 작품이죠. 예수의 시신을 발 쪽에서 바라보는 시점으로 그려, 마치 눈앞에서 가족의 시신을 바라보는 듯한 강렬한 현실감을 줍니다. 기존의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거나 여러 성인들의 애도를 받는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만테냐는 앞에서, 그것도 살짝 위에서 바라보며 르네상스 회화의 파격적인 실험정신을 보여줍니다. 마치 대리석 위에 조각이 올려진 것 처럼, 만테냐 특유의 조각과 같은 표현이 돋보이네요. 예수의 오른쪽엔 마리아와 또 다른 여인이 자리하고 있는데,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는 주름진 얼굴이 인상적입니다.



8번 방에 들어서면 조반니 벨리니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가>를 볼 수 있습니다. 조반니 벨리니는 조르조네, 티치아노에 영향을 준, 베네치아 화파의 선구자입니다. 이 작품은 베네치아 화파 특유의 풍부한 색채감과 동방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국적인 분위기가 특징이죠. 실제로 베네치아가 동방과 활발히 교류하던 시대적 배경이 반영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당시 부유한 도시국가였던 베네치아는 동방에서 귀한 안료를 비교적 쉽게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에, 벨리니를 비롯한 베네치아 화파 화가들은 화려한 색채를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죠. 이 그림은 본래 베네치아 산 자카리아 교회 제단에 있었으나, 나폴레옹의 지시로 브레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24번 방의 주인은 단연 라파엘로의 <성모의 결혼>입니다. 라파엘로의 초기작이지만 이미 완성도가 매우 높습니다. 라파엘로는 후경에 아름다운 건물을 그려 넣었는데, 이는 친구인 브라만테가 1502년에 지은 템피에토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이 건물과 인물들의 완벽한 원근법 구성이 보이시나요. 이는 스승 페루지노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라파엘로만의 균형감각이 드러나는 부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사제가 구혼자들에게 지팡이를 갖고 오게 했는데중 요셉의 지팡이에서만 꽃이 피었다고 해요. 요셉이 신랑으로 간택되자 이에 실망한 젊은이가 지팡이를 부러뜨리는 장면이 재밌네요. 결혼 반지를 끼워주는 순간을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인물들이 르네상스의 ‘조화와 균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29번 방에서는 1606년에 그린 카라바조의 <엠마오의 저녁식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과 식사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던 제자들이 손에난 못자국을 보고 놀라는 장면입니다. 카라바조의 상징과도 같은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범한 식사 장면에 신적인 순간을 담아냅니다. 특히 제자가 놀라며 팔을 벌리는 장면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생동감을 주면서 보는 사람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엠마오의 저녁식사>. 출처 : 런던 내셔널 갤러리


카라바조는 1601년에 이미 <엠마오의 저녁식사>를 그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한 직후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통통하고 화려한 모습에, 제자들의 몸동작들도 연극처럼 과장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1606년 후기 작품에선 예수 그리스도가 더 깊고 무거운 표정으로 어둠 속에 앉아 있습니다. 제자들의 자세와 표정도 연극적이라기 보다는 이 상황을 이해하고자 하는 절박함이 더 묻어나죠.

 

카라바조는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화가 중 한명입니다. 여담이지만, 카라바조의 작품을 보기 위해 몰타까지 다녀왔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또 풀어보겠습니다.



37번 방에 들어가면 이 미술관의 상징과도 같은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키스>가 등장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연인의 격정적이고 뜨거운 키스 장면이지만, 실제로는 이탈리아 통일을 염원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붉은 옷을 입은 남성은 프랑스, 그리고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이탈리아를 의미하죠.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북부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었고, 프랑스를 통일을 도와줄 외부 동맹으로 생각했죠. 망토의 색감과 인물의 자세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숨겨져 있어, 단순한 로맨스 그림 이상의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키스> 옆에는 제롤라모 인두노의 <슬픈 예감>이 걸려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전쟁터가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한 여성이 편지를 읽는 장면 속에는 당시의 불안과 기다림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그런데 왜 이작품을 <키스> 옆에 걸어두었을까요. 여러분. 혹시 그림 가운데 벽에 걸린 그림이 보이나요. 바로 <키스>입니다. 이는 사랑과 이별의 순간이 실제 삶에서는 전쟁과 기다림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장치로, 이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휴식이 주는 여운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자연스럽게 카페로 이어집니다. 긴 여정을 마친 뒤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 잔은 단순한 휴식 이상의 의미를 줍니다. 방금까지 마주했던 작품들을 천천히 되새기니, 브레라라는 공간이 단지 미술관이 아니라 ‘시간과 이야기의 흐름’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브레라의 가장 큰 매력이지만,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전시 방식입니다. 브레라 미술관은 시대 흐름에 따라 작품을 체계적으로 배치해, 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죠.

 

뿐만 아니라 일부 공간에서는 작품을 단순히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해 관람의 몰입도를 높여줍니다. 예를 들면 프란체스코 하예즈 <키스>에 나오는 여인의 드레스를 만져보게 전시하는 거죠.



이는 브레라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경험하는 미술관’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밀라노 중심부, 두오모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브레라 미술관은, 화려한 랜드마크에에 가려져 있지만 사실상 이 도시 예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서 탄생하고, 나폴레옹에 의해 길러진 미술관

 

밀라노를 방문하신다면 브레라 미술관에서 이 도시가 가진 진짜 깊이를 직접 느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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